논과 습지의 탄소흡수 기능 - 농업에서 블루카본을 실현할 수 있을까?
블루카본, 해양만의 이야기일까?
‘블루카본(Blue Carbon)’은 원래 해양생태계, 특히 갯벌, 염습지, 맹그로브, 해초 숲 등에서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생물량이나 퇴적토 형태로 저장하는 탄소를 의미한다. 이는 전통적인 ‘그린카본(육상 식생 기반 탄소)’과 달리, 물과 관계된 생태계에서 발생하는 탄소 저장 시스템을 가리킨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이 개념이 해양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논과 습지처럼 물이 고이는 농업 기반 생태계에서도 유사한 탄소 저장 메커니즘이 작동함이 밝혀지고 있다. 특히 논은 전 세계 논농사 면적의 90% 이상이 동아시아에 집중되어 있어, 농업 기반 블루카본을 실현할 수 있는 핵심 생태계로 주목받고 있다.
이 글에서는 블루카본의 기본 개념부터, 논과 습지의 탄소흡수 기능, 관련 연구 사례, 농업 분야에서 실현 가능성, 그리고 정책 방향까지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블루카본의 개념과 토지 기반 생태계로의 확장
블루카본(Blue Carbon)은 2009년 유엔환경계획(UNEP)에 의해 개념화되었으며, 해양 및 연안 생태계에서 이산화탄소를 흡수·저장하는 과정을 정의한 용어다. 맹그로브, 해조류 숲, 염습지 등은 식물이 광합성을 통해 탄소를 흡수하고, 고사된 생체 조직이 퇴적층에 매몰되어 장기적인 탄소 저장소 역할을 한다. 물속에서 산소가 부족하기 때문에 유기물이 완전히 분해되지 않고, 혐기성 조건 하에서 탄소가 오랜 기간 보존되는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이와 유사한 현상이 육지의 특정 농업 생태계에서도 발견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논이다. 논은 지속적인 담수 상태에서 벼를 재배하는 구조로, 일정 기간 동안 습지가 형성되는 구조적 특성을 지닌다. 이는 습지 생태계처럼 토양 속 유기물 분해가 느려지고, 퇴적토 내에 유기탄소가 장기적으로 축적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
이러한 관점에서 최근에는 ‘인공습지형 농업 블루카본(agro-wetland blue carbon)’이라는 개념이 제안되며, 전통 논농사를 탄소중립 실현의 수단으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다. 즉, 논은 단순한 작물 재배 공간이 아니라, 탄소를 흡수하고 저장할 수 있는 잠재적인 블루카본 생태계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논에서 발생하는 탄소 저장과 메탄 생성의 이중성과 해결 방안
논이 블루카본 저장소로 기능할 수 있는 반면, 동시에 강력한 온실가스인 메탄(CH₄)을 배출하는 이중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이는 논의 물 관리 방식과 작물의 생리작용, 그리고 토양 내 미생물 활동에 따라 탄소 흐름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논의 물이 잠긴 상태에서는 산소가 거의 없는 혐기성 환경이 조성되고, 이로 인해 혐기성 미생물이 유기물을 분해하면서 메탄이 생성된다. 이 메탄은 벼 뿌리나 토양 틈을 통해 대기 중으로 방출되며, 이 과정에서 탄소 저장보다 탄소 배출량이 더 커질 수도 있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벼의 뿌리 생리 구조, 유기물 분해 속도, 수위 관리 방식 등을 조절함으로써, 메탄 배출은 억제하고 탄소 고정 효과는 유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입증되고 있다. 특히, 벼 수확 후에 볏짚을 완전히 제거하고, 일정 기간 논물을 말리는 ‘중간 물떼기’ 기술은 메탄 배출을 30~50% 줄이면서도 토양 내 유기탄소 함량은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방법으로 주목받는다.
따라서 블루카본으로서의 논의 기능을 극대화하려면, 단순히 물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정교한 수분관리와 미생물 생태 조절, 작물 선택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이는 ‘탄소 저장 기능’과 ‘온실가스 감축 기능’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이중 최적화 전략이라 할 수 있다.
국내외 연구 사례: 블루카본 농업의 실증
국내에서는 국립환경과학원과 농촌진흥청이 공동으로 ‘농업형 블루카본 실증 연구’를 수행 중이다. 전북 김제시의 한 시험논에서는 벼 재배 후 논을 휴경 상태로 유지하면서 수위를 5cm로 관리한 결과, 토양 유기탄소 농도가 1년 동안 18% 증가했다. 같은 지역의 통상 농법 대비 CO₂-eq 기준 연간 1.2톤 감축이라는 수치를 기록하며, 탄소저장 효과를 실증했다.
국외에서는 중국 양쯔강 유역에서 진행된 대규모 프로젝트가 주목할 만하다. 이 프로젝트에서는 벼농사 지역 1,500헥타르를 대상으로 블루카본 저감 농법을 적용한 결과, 3년 만에 토양 내 유기탄소 함량이 평균 2.1% 증가했으며, 메탄 배출은 35% 감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토양에 바이오차를 함께 적용하면 탄소고정 효과가 중첩되어 더 높은 감축 효과를 보였다는 보고도 있다.
이처럼 실제 농업 현장에서의 블루카본 실현은 단순 이론이 아닌 구체적 데이터로 증명되고 있으며, 농업이 기후위기 대응의 수동적 대상이 아닌 능동적 탄소저감 주체로 전환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논·습지 탄소 저감의 현실적 과제
농업 블루카본은 가능성이 크지만, 실행에는 몇 가지 복잡한 과제가 따른다.
첫째는 측정 기술의 부재다. 논에서 저장되는 탄소량은 측정이 어렵고, 메탄 배출과 혼합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실질적 감축량 산정이 매우 복잡하다. 이 때문에 배출권 인증이나 탄소 크레딧 거래로의 전환이 어렵다.
둘째는 지속성 문제다. 논의 수분 조건이 해마다 달라지고, 휴경 여부나 작부 체계에 따라 탄소 저장 효과가 급변하기 때문에, 장기적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이는 블루카본을 기후금융(탄소크레딧 등)과 연계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다.
셋째는 농가의 인식 부족이다. 탄소저감 농법에 대해 많은 농민들이 실질적 소득 향상과 연계되지 않는다고 느끼며, 비용 대비 효과에 의문을 갖는 경우가 많다. 특히, 물 관리나 작물 잔사 처리 등의 기술적 장벽도 현실적인 문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논의 탄소 저감량을 실시간으로 추적할 수 있는 데이터 기반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며, 국가 차원에서 논 기반 블루카본 감축 효과를 공식 인증하는 기준 체계도 마련되어야 한다. 또한, 농민에게 탄소 감축 실적에 따른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제도화가 반드시 병행되어야 실질적 확산이 가능하다.
정책적 방향과 농업 블루카본의 미래 전략
블루카본을 농업에서 실현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기술 도입을 넘어, 제도·데이터·경제적 유인을 아우르는 통합 전략이 필요하다. 먼저, 농업형 블루카본 정의와 분류 기준이 명확해야 한다. 현재까지는 해양 중심으로만 정의되어 있어, 논·내륙 습지의 탄소 저장 기능이 제도권에서 배제되고 있다.
다음으로는, 국가 단위 블루카본 인벤토리(저장량 조사 시스템)를 농업 분야에도 적용해야 한다. 위성 이미지, 토양 샘플링, 메탄 센서 등을 활용해 정량적 데이터 기반 평가 체계를 마련하면, 논농사도 탄소크레딧 시장에 참여할 수 있다.
또한, 논에서 발생한 블루카본 실적을 '농민 직불제'나 '농산물 인증'과 연계하는 방안도 유효하다. 예를 들어, 블루카본 농법으로 생산된 쌀에는 ‘저탄소 인증’ 라벨을 부착하고, 고부가가치 프리미엄 시장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다기능 생태계로서의 논과 습지를 재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단순한 생산지로서가 아니라, 생물다양성 보존, 수질 정화, 탄소 흡수까지 수행하는 탄력적 생태 기반 시설로 간주해야 하며, 이에 따른 관리 주체, 예산 배분, 공간 계획이 다시 설계되어야 한다.